[더구루=오소영 기자] "미래 세대들이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신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혁신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고 혁신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혁신 생태계를 빨리 조성해야 미래 세대들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바로 '혁신'이었다. '1세대 벤처기업인' '벤처업계 대부'로 불리는 주성엔지니어링 용인 연구·개발(R&D)센터 곳곳에 녹아있다. 이 센터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태양광 장비의 R&D를 한 곳에 모으고자 1조원 이상을 투자해 지난 2020년 문을 열었다. 현재 400여 명의 연구원이 상주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건 경영 조직이 있는 4층과 영업·개발 조직이 있는 5층을 연결하는 미끄럼틀이다. 이 미끄럼틀은 '0.1초의 빠른 속도'와 '협업'이 혁신의 씨앗이라는 황 회장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 사재 털어 일원과학재단 설립…160여명 장학금 제공
혁신은 황 회장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출구였다. 경북 고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황 회장은 인하공대를 졸업한 후 현대전자를 거쳐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에 영입됐다. 세계적인 기업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황 회장은 "외국인 엔지니어를 도와주는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며 "한국인 엔지니어가 세계 최초의 원천 기술을 개발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계를 느낀 황 회장은 창업의 길을 걸었다. 1993년 주성엔지니어링을 설립해 약 3년 만에 세계 최초로 D램 커패시터용 원자층박막증착(ALD) 장비 양산에 성공, 세계 1위 ALD 장비 기업의 반열에 올려놨다.
혁신이 자신의 삶을 바꿔놨듯, 황 회장은 주성엔지니링의 구성원, 나아가 미래 세대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인재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황 회장은 사재를 털어 지난 2001년 일원과학재단을 출범했다. 학벌과 전공에 관계없이 장학생을 선발해 지원하고 있다. 현재까지 19기, 160명 이상에 장학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용인 R&D센터에는 일원과학재단 장학생들의 사진이 벽면 한쪽을 가득 채웠다.
황 회장은 "아무리 명문대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논리와 철학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한다"며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재단 설립의 배경을 밝혔다. 이어 "후배 장학생들에 기부하고 싶다는 선배들이 나오고 있다"며 "참 감사한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 반도체 판 바꿀 '3-5족·3-6족 화합물'로 '퀀텀점프'
오늘날 주성의 주력은 웨이퍼 표면에 얇은 막을 화학적으로 증착하는 ALD 기술이다. ALD는 미세화 공정의 필수 장비로 꼽히지만 초기 상업성이 낮았다. 더욱이 공급 이력이 없는 벤처 기업에 잠재 고객사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황 회장은 "아무리 좋은 기술이어도 고객이 인정해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우리 기술을 필요로 하는 미국 기업을 찾아서 협업을 요청했고 양산을 진행하려 했는데 장비를 도로 가져가라는 말을 들었었다"며 "현장에서 고객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로 (장비를) 업그레이드 해 보여드렸다"고 덧붙였다.
황 회장은 '혁신'과 '신뢰'는 반드시 공존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신뢰는 시간을 필요로 해서다. 하지만 혁신이 있는 곳에 신뢰가 있고, 신뢰가 있는 곳에 혁신이 쫓아온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주성엔지니어링은 '3-5족, 3-6족 화합물 반도체'로 또 한번의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 회사는 단결정 실리콘 웨이퍼에 더 많은 칩을 넣기 위해 경쟁해왔다. 이를 위해 비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도입해 회로 선폭을 미세화했다. 하지만 미세화는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마치 한정된 부지에 평수를 줄여 단독주택을 늘려봤자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접근법을 바꿨다. 단독주택 대신 고층 아파트를 짓자 아이디어를 냈다. 즉, 단결정 실리콘 웨이퍼가 아닌 다른 재료에 트랜지스터를 구현할 수 있다면 미세화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게 탄생한 기술이 3-5족, 3-6족 화합물이다.
3-5족 화합물이 반도체 업계에 등장한 건 1960대 초지만 상용화까지 난제가 많았다. 1000도 이상의 고온 공정에서 진행됐고, 하부 구조와 재료 품질이 뒷받침돼야 구현이 가능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이를 400도 이하로 낮추고 생산성을 확보했다. 황 회장은 "실리콘보다 훨씬 저렴하고 쉽게 양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고 자신했다.
또한 실리콘관통전극(TSV)을 대체할 글라스관통전극(TGV)용 장비에도 투자하고 있다. TGV는 실리콘 대신 유리기판을 사용해 고집적 패키징을 가능케 하며 신호 손실과 발열 문제도 최소화할 수 있다. 황 회장은 "과거에는 무조건 가격이 저렴해야 해 TSV를 활용하려 했으나 이제 AI 칩 한 개가 1억원을 하는 시대가 왔다'며 "비용이 아니 품질이 중요해지면서 TGV 기술이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