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루=진유진 기자] 중국이 전기차(EV) 배터리 음극재 핵심 소재인 흑연을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수출해 미국 흑연 산업을 저해했다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예비 판정이 나왔다. 이는 미·중 간 흑연 전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나온 첫 사법적 판단으로, 향후 양국 간 무역 갈등 전개 양상과 관세 정책 변화가 글로벌 공급망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3일 업계에 따르면 ITC는 전날 중국이 천연·합성 흑연을 불공정한 가격에 수출해 시장 질서를 왜곡했다는 예비 결정을 내렸다. 이번 판정은 미국 흑연 생산업체들을 대표하는 활성음극재생산자협회(AAAMP)가 지난해 12월 미국 상무부와 ITC에 중국산 흑연에 대해 최대 920%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며 반덤핑 조사를 요청한 지 두 달 만에 나온 첫 번째 결과다.
호주 노보닉스(Novonix)를 비롯한 북미 흑연 연합(NAGA) 소속 기업들도 이에 동참했다. 로버트 롱 노보닉스 임시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이 글로벌 핵심광물 공급망을 통제하려는 전략적 시도는 미국의 에너지 및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비판했다.
ITC의 예비 판정이 나온 만큼 해당 사안은 미 상무부와 ITC에서 병행 심사된다. 상무부가 중국의 불공정 가격 책정 정도를 최종 판별하면 이에 상응하는 추가 관세가 부과될 전망이다. 현재 중국은 글로벌 흑연 공급망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전 세계 자연 흑연 생산량의 86%, 인조 흑연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며, 배터리용 흑연 시장 점유율도 95%에 달한다. 블룸버그는 흑연 가격이 900% 상승할 경우 총 배터리 생산 비용은 두 배 증가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번 조치는 한국 배터리 업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공언한 상황에서 중국산 흑연에 대한 고율 관세까지 현실화될 경우 단기적으로 배터리 업계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생산시설 확충과 공급망 다변화가 가속화되면서 한국 기업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현재 한국 내 유일한 흑연 음극재 생산 기업이지만, 중국산 저가 흑연과의 경쟁으로 실적 둔화를 겪고 있다. 이에 대응해 탄자니아,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원료를 조달하며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모든 배터리 소재에 관세를 부과한 후, 동맹국들과 개별 협상을 통해 관세를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한국이 우방국으로 포함될 경우 국내 기업들은 반사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의 반덤핑 조사가 진행되면서 미·중 무역 갈등이 흑연을 둘러싼 전쟁으로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중국을 상대로 관세 전쟁을 시작한 만큼 반덤핑 조사가 완료되면 강력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이에 맞서 중국도 반격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미 흑연 수출 통제를 시작한 데 이어 갈륨·게르마늄·안티몬 등의 대미 수출을 추가로 제한한 중국이다. 향후 미국이 규제 강도를 높이면 중국도 흑연 수출 통제를 강화해 글로벌 공급망에 충격을 줄 가능성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