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구루=정예린 기자] 대한항공이 싱가포르 'ST엔지니어링'과 처음으로 손잡고 '보잉737 맥스' 시리즈 항공기 엔진 정비를 맡긴다. 자체 항공기 유지·보수·정비(MRO) 역량에 외부와의 파트너십까지 더해 안전 운항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행보로 풀이된다.
ST엔지니어링은 23일(현지시간) 대한항공과 5년간의 MRO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대한항공이 운용하는 보잉737 맥스 시리즈에 장착된 CFM인터내셔널(CFMI)의 LEAP-1B 엔진을 관리한다. 계약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ST엔지니어링이 제공하는 서비스에는 고압 터빈(HPT)과 성능복원점검(PRSV) 등이 포함된다. ST엔지니어링은 싱가포르에 위치한 자사 MRO 시설에서 대한항공과의 계약에 따른 서비스를 지원할 방침이다.
대한항공이 자체 MRO 사업을 확대하고 있음에도 ST엔지니어링과 협력키로 한 것은 LEAP-1B 엔진에 대한 정비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항공은 △PW의 PW4000 시리즈·GTF 엔 △CFMI의 CFM56 엔진 △제너럴일렉트릭(GE)의 GE90-115B 엔진 등 총 6종에 대한 분해조립(오버홀) 정비를 수행하고 있다. 향후 GE의 GEnx 시리즈와 CFMI의 LEAP-1B를 포함해 정비 가능한 엔진 모델을 총 9종으로 늘린다는 목표다.
보잉737 맥스 시리즈가 사고가 잦은 기종이라는 점 또한 항공기 정비 경험이 풍부한 전문 기업과 협력하게 된 주요 배경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보잉737 맥스는 과거 잇단 결함으로 크고 작은 사고가 수차례 발생한 기종이다.
2018년 10월에는 인도네시아 라이온 에어 소속 보잉 737맥스가 추락해 탑승객 189명이 전원 숨졌다. 5개월 뒤인 2019년 3월에도 에티오피아 항공 소속 보잉 737 맥스가 소프트웨어 결함 등으로 이륙 6분 만에 추락해 157명 전원이 사망했다.
작년 1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국제공항을 이륙한 알래스카항공 1282편 보잉 737 맥스9 여객기가 약 5000m 상공을 비행하던 도중에 창문과 벽체 일부가 뜯겨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같은해 3월에는 텍사스주 휴스턴 국제공항에서 유나이티드항공의 보잉 737 맥스8 기종이 착륙해 활주로를 주행하던 중 포장된 도로를 이탈했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은 알래스카항공 사고 이후 보잉737 맥스 기종의 월간 생산량을 38대 이하로 제한하며 증산 불허 결정을 내렸다. 안전과 품질 검사 절차도 강화했다. 보잉사는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한 추락 사고와 관련해 4억8700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받은 바 있다. 대한항공은 2018년 사고 이후 보잉707 맥스 운항을 중단했다가 안전 점검 등을 마치고 2022년부터 순차적으로 재도입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6월 대한항공이 운항하던 보잉737 맥스8가 기체 이상으로 긴급회항한 바 있다. 승무원과 승객 130여 명을 태우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대만 타이중 공항으로 향하던 중 전남 진도 앞바다를 지난 직후 '여압 계통 이상'을 보고한 뒤 제주도 서쪽 해상을 맴돌다가 인천공항으로 회항했었다.
조원태 회장은 최근 안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 이후 첫 임원 인사 및 조직개편에서 안전 운항 등을 총괄하는 안전보건총괄(CSO) 조직을 신설했다. 대한항공 출신 조성배 신임 부사장을 안전보건총괄 겸 오퍼레이션 부문 부사장(CSO)에 선임했다. 조 회장은 올 초 신년사에서도 "안전은 고객과의 기본적인 약속"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대한항공이 MRO 역량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또한 조 회장의 '안전제일' 경영 기조와 궤를 같이 한다. 자체 기술을 구축하면 결함이나 사고에 즉각 대응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해외에 의존해온 국내 정비 수요를 가져와 수익성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3월 인천 영종도 운북지구에 아시아 최대 규모 엔진 정비 클러스터 기공식을 개최했다. 5780억원을 투자, 축구장 20개 규모 부지에 지하 2층~지상 5층 건물을 짓는다. 오는 2027년 완공될 예정이다.
대한항공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민간 항공기 엔진 정비 공장을 가지고 있는 항공사다. 1976년 보잉707 항공기 엔진 중정비 작업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5000여 대의 엔진을 정비하며 세계 10위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자회사 진에어 등 국내 항공사와 델타항공, 중국남방항공 등으로부터 수주하고 있다.
ST엔지니어링은 아시아 최초로 CFMI의 LEAP 엔진 시리즈에 대한 '프리미어 MRO' 공급업체로 지정된 회사다. 작년 싱가포르 공장에서 LEAP-1A과 LEAP-1B 엔진 테스트 역량을 인정받고 관련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한항공 외 제주항공 등과도 계약을 맺고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테이 엥 관 ST엔지니어링 엔진 서비스 책임자는 "이 계약은 대한항공이 고품질 엔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장기적 성장 계획을 지원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 ST엔지니어링의 능력을 입증하는 사례"라며 “CFMI LEAP 엔진에 대한 프리미어 MRO 공급업체로서, 우리는 항공사가 신뢰할 수 있는 운영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